가끔 되뇌어지는 다음의 교수님 말씀들이 나의 생활에 밝은 지표가 되고 있다.
첫째, 울안주의와 요행을 버리자.
우리 사회가 오랜 전통 속에서 팽배해진 병폐의 하나가 울안consciousness, 즉 울안주의이다. 가문주의, 지역주의, 학벌주의에 안주하면 자기에겐 진정한 의미의 인생은 남는 게 없다. 소인은 懷土하고 군자는 懷德한다. 혈연, 지역 연고, 학연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소인이다. 소위 트인 사람은 덕을 생각한다.
둘째, 머리와 가슴과 손의 조화
Rousseau는 '에밀'에서 "나는 철학자처럼 사색하고 농부처럼 일하는 인간을 만들겠노라"고 역설한 것을 오늘날 그대로 받아들여, 머리와 가슴과 손의 조화 없이는 전인이 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 동안 교육을 통하여 전인을 기르자는 구호를 외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머리만 키우거나, 기술만 익혀주는 편협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자연히 현대는 인간을 지리멸멸하게 하는 사회가 되었고 기계, 배금,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 우리 사회는 인간성 회복운동 이라는 Humanism물결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지구촌을 파괴로부터 보호하자는 '지구촌의 멜랑꼬리(우울)'가 나타났다. 그들은 자연을 동경하며 미답의 땅을 찾으려는 갈망으로 인류생사결정의 근원을 찾아 헤맸다. 물질적인 지배 속에서 그나마 다행으로 자연 속에서의 교육(Emile), 즉 자연환경이 인간을 자연스럽게 교육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셋째. 생은 2차원의 세계, 한 번 뿐인 생을 중히 여기자.
1953.6.29.11:30 Everest를 정복한 G. L. Mallory는 '정복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해서는 아니 된다'고 보았다. 그는 '정복해도 귀환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것이다. 정복자들은 암흑의 시대를 참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칠흑이라 해도 여명이 밝아 올 희망과 기대가 부풀며(여명잉태), 새벽에 떠나는 발길은 낙관적인 일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생은 2차원의 세계다. 극한 상황에 처할 때도 있고, 한계상황에 닿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일을 체험하며 이를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는 극적 장면이 많다. 인생의 매 순간 매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결코 1차원이 아니다. 찬란한 황혼에 출발하면 어둠만이 있을 뿐(암흑의 잉태)이니, 중하고도 중한 나의 생을 차원 높게 승화시켜야 한다.
역사의 무명인이라도 시민, 자식, 사회에 해 끼치지 않고 의무이행 했다면 평범하지만 훌륭한 인생. 값있는 인생(여기에 가치의 accect가 붙어야 함)이다. 인생을 어떻게 충실하게 보람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하다. 의식구조의 변화가 없는 한 한국사회의 발전은 요원하다.
인간이 되어서 무엇 하느냐는 질문에 굳이 답을 구할 이유가 없다. 인간 그 자체가 목적이기 대문이다. 충실한 생을 통하여 인간을 완성시키는 게 생의 목표다. 현대 전환기의 무서운 사조로서 네 가지가 보인다. 하나는 허무주의이다. 일체를 부정한다. 일체를 의심하나 자신의 말은 긍정하는 모순에 빠진다. 둘은 염세주의이다. 그들은 현실을 비판만 하고 부정하기만 한다. 세상이 싫다. 셋은 상대주의이다. 그들은 과격한 경쟁을 통하여 상대를 파멸시킴으로써 성공감을 갖는다. 넷은 회의주의이다. 의심하고 강박적이며 불신이 만연되어 옳은 일이 없다.
Humanism의 적은 위와 같은 무서운 사조들이다. 인간을 부정하면 자살이 따른다. 진실로 인간이 목적이라면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이 급하다. 이 세상에는 교장이 되기 위해 인간을 폐업한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인간의 사다리 맨 밑바닥 인간의 노고를 모르는 사회나 팀은 성공할 수 없다. 맨 밑바닥 어머니의 산고(빛나지 않는 힘)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게 아닌가!
Mallory는 'We expect no mercy from Everest.(우리는 Everest로부터 아무런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라 하였다. 살아가는 데 결코 요행만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다.
넷째, 인생은 고뇌와 결단의 연속
고뇌와 결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기(안정기)가 있다면 좀 좋을까. 고뇌, 결단을 모두 가지지 않고도 살수 있다거나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필시 그들은 무사안일주의자이거나 낙천주의자이거나 점액질적 기질의 소유자이리라.
그러나, 현대는 전환기에 놓여 있기에 고뇌가 필수이며 결단이 따라야 하는 시점에 놓여 있다. 역사도 근원적으로는 고뇌와 결단의 구조적 표현이라고 본다.
철학자 Jaspers 역시 '철학 한다는 것은 하나의 결의의 문제'라고 보고 있듯이 고뇌만 있을 뿐 결단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고뇌 없는 결단은 맹목이요,(경거망동)
결단 없는 고뇌는 공허하다.(우유부단)
고뇌를 풀이하면 결단으로 옮아가기 직전의 전인적 의식내부에 맴돌고 있는 잠재적 미정의 상태라 할 수 있고, 결단을 풀이하면 전인적인 내적 조화가 의식 외부로 나타나는 정신의 집약적 상태라 할 수 있으니, 결단이 이어지는 고뇌라야 생산적이고도 창조적인 것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발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하는 것은 모든 학에 대한 철학의 우월성이다. 철학을 통하여 인간과 그 현실을 지도할 수 있는 세계관(인생관, 가치관)을 정립함으로써 인생을 보다 진실하게 영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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