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양가감정
양가감정兩價感情
내가 청개구리 심리를 갖고 있는 모양이다.(중략) 제발 거울 앞에서 서서 보라. 늙고 병든 당신을. 황혼녘 시간의 벼랑길을 브레이크 없이 쓸려 내려가는 당신을. 아, 어째서 선생님은 자신을 보지 못할까. 이것은 노망이다.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 미친 질주를 막아야 한다. (중략) 차라리 아예 치매를 깊어지게 하여 완전히 놓아버리게 하는 약이 있다면 구하고 싶다. 그러나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선생님을 잃고 싶지 않다. 나는 여전히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다. 때로 선생님이 장애물이며 짐이라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선생님 없이 살아가는 것보다 백배 낫다. -최근 각광 받는 소설의 한 대목-
'양가감정'兩價感情.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양가감정이란 두 가지의 상호 대립되거나 상호 모순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를 말한다. 흔히 두 가지의 반대되는 가치·목표·동기 등이 공존할 때 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서적 양가는 정신분열증의 일반적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 소설의 한 대목을 보더라도 자신을 간단없이 참견하는 선생님에 대하여 증오가 부풀어 올라 차라리 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버렸으면 하는 한편, 존경하는 선생님이고 아직도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선생님은 결코 장애물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나섰다.
인간이 가진 성격의 모든 면에서는 다 양면이 있다. 감정면에서 볼 때 동시에 동일한 목적에 상반된 감정을 갖고 있을 때가 있다. 이와 같이 서로 용납되지 않는 양극의 대표적인 예가 사랑과 증오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한쪽만 보인다 해도 다른 한쪽도 존재하는 것이며 그 보이지 않는 한쪽은 의식하지 못하나 억압된 부분으로서 죄악감이나 불안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병든 가족을 간호하는 사람은 한쪽으로는 정성과 사랑을 느끼지만, 그 반면에 그에게 품은 적개심이나 귀찮게 여기는 마음은 의식하고 있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정성과 사랑을 느끼는 반면에 적대하는 충동을 함께 갖고 있을 때, 그 밑에 흐르는 마음을 억압하기 위하여 의식적으로 사랑을 더 강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사랑해야 할 가족에게 적개심을 느낀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무의식에 억눌리는 것이다. 그것이 만약 의식으로 나타나면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 실연을 당한 순간, 지금까지 사랑스럽게만 보았던 그녀가 미움에 가득 차 보이는 것은 양가감정이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양가적이었다고 한다. 프로이드는 1856년에 동유럽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7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피 장사를 했던 어버지는 40세였고, 엄마는 20세였다. 둘 다 ‘유대인’이었다. 아버지에겐 세상을 떠난 전처가 낳은 아들이 둘 있었다. 배다른 큰형의 나이는 프로이드의 엄마보다 많았고, 작은형은 엄마와 동갑이었다. 어린 시절엔 엄마가 (여)동생을 낳기 위해 며칠간 집을 비웠을 때 강한 불안과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 자신에게 쏠려 있던 집안의 관심이 동생에게로 옮겨 가는 것을 느끼고는 새로 생겨난 동생에게 강한 적대감을 표출하곤 했다. 빈에 이사와서도 동생들은 잇따라 태어났고, 그때마다 엄마는 얼마 동안 사라지곤 했다. 그는 집안의 관심이 자신으로부터 새로운 식구에게로 분산되는 것을 보고, 엄마에게 계속 아기를 낳게 하는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과 엄마를 잃을지 모른다는 참담한 불안을 자주 느끼곤 했다.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강렬한 소유욕과 자신을 안심시켜 주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증오 사이의 갈등은 어린 프로이드의 정서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였다. 그는 불안과 갈등을 억압함으로써 성인이 된 후에도 여성에게 강한 애착과 분노를 함께 느끼는 양가감정에 오랜 기간 휘말리게 된 것이다.
앞의 소설의 한 대목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서는 자칫 감정에 치우쳐 무의식적으로 자기감정에 휘둘리는 경우가 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사는 법은 없을까.
<감정치유>의 저자 루시아 카파치오네는 미국의 유명한 미술치료사이자 25년간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한 대중 워크숍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화, 슬픔, 우울, 두려움 등의 감정을 부정적으로 보고 행복한 얼굴로 덧씌우려는 경향이 있으나 이 감정들을 충분히 인식하고 아파해야만 진정으로 행복과 사랑, 기쁨, 그리고 평화 같은 더 긍정적인 감정을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서울 것 하나 없어.” “사내 녀석은 울면 안 돼.”라며 아이의 감정 상태를 부모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아이의 입장에서는, 솔직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잘못됐다고 인식하게 되면서 자존감에 큰 손상을 입으며 성장하게 된다고 보았다. 그는 감정도 하나의 언어처럼 배우고 연습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보고 일반인들이 크레파스나 색연필, 잡지 등 간단한 미술재료와 음악, 춤 등의 예술매체를 활용하여 감정언어를 쉽게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과정마다 사별, 이별, 이직, 지진, 버려짐 등 수많은 상실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감동적인 사례들이 많이 담겨 있는데, 이들은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하게 되면서 내면의 힘과 지혜, 그리고 큰 행복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실제로 행한 사람들은 감정 근육이 단련되면서 감정을 조절하고 점차 감정이 삶의 안내자라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정신요법이나 사례연구에 있어서도, 애정과 증오, 독립과 의존, 존경과 경멸 등 완전히 상반되는 감정을 동일대상에 대해 동시에 갖는 양가감정을 중심으로 상담이 이루어지며, 상담과정에서 양가감정의 존재자체의 확인과 그 처리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치료의 목적은 서로 모순된 감정의 양면에 대한 내담자 자신의 자기인식과 통합을 이루는 데 두고 있는 것이다.
(201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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